검은 집

​ 손 은영

윌리암 헨리 폭스 톨벗은 사진 인화의 발견자로 여긴다. 톨벗은 1839년, 미술가의 연필 없이도 자연 물체 자체를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반다이크 브라운 인화와 연관이 있다. 톨벗은 종이를 질산은으로 코팅을 했고, 청사진법(사이아노 인화)의 발명가인 존 허쉘 경은 톨벗에게 티오황산 나트륨(정착액)으로 정착을 해서 이미지를 영구적으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톨벗을 사진 발명가 중의 한명으로 여기는데 그의 프로세스는 네가티브를 만들고, 종이에 포지티브로 인화가 되도록 했다.

 

반다이크 브라운 인화(Van Dyke Brown Print)는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만들어진 인화법이다.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하고 있는 사진술은, 최초의 사진술(1827년 경)을 발명한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와 윌리엄 헨리 폭스 톨벗의 발명을 기반으로 빛에 반응하는 물질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이용해 대량의 사진을 제작하는 기본적인 개념을 만들어냈다.

 

반다이크 브라운 인화는 풍부한 디테일을 가지면서 갈색의 모노크롬으로 사물을 표현해 낸다. 본인은 판화지(전지와 2절)에 직접 붓질하고 건조시켜서 인화지를 만들고, 자외선으로 빛을 주어 최종 사진을 만들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본인의 서양화 전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지금의 이미지 대량복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술 초기의 이미지 생산방식이 갖는 직접적이고(밀착인화) 거칠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 본인은 상처받고 허물어지고 탄 집에 새로운 숨결을 손으로 불어넣고 싶었다. 다시 말해 죽은 듯이 존재의 앙상한 몰골만 남아있는 집과 여타 구조물들이 놓여있는 장소에 주목하였다.

 

하이데거가 말한 '거주하다' 즉, 인간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확인하고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질인 '거주하다'를 죽은 듯이 타다 살아남아 있는 집과 구조물에서 보고 싶었다.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순환(circulation)의 일부가 아닌가. 디지털사진에 비해 긴 호흡이 필요한 반다이크 브라운 인화의 단색조를 통해 들어내고 치유하고, 사유하고 싶었다.

손은영의 사진, 말과 여인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사진은 폭력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이지만 무방비상태의 누군가에게, 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황망한 사람들의 면전에, 그리고 불난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는 분명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 아마도 찍히면 죽는다는 세상 말은 원래 사진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사진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다. 폭력적인 현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증언하는 사진의 운명이다. 어쩜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이미지의 운명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이미지가 사진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과학이고 회화는 감각이다.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말이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이처럼 사진을 과학이라고 전제하고 보면, 사진은 진화와 발전의 산물이다. 사진이 발명되던 초기에는 과학이 그런 것처럼 무수한 형식실험과 허다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그 사진들은 실패한 사진들이다. 동시에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사진들이다. 사진사에도 회화적인 사진이 있었지만, 그렇게 처음부터 회화를 겨냥한 사진들보다 오히려 더 회화적이고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다. 그동안 사진의 폭이, 회화의 폭이, 그리고 현대적이라는 개념의 폭이 더 넓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고성에 산불이 났다. 손은영은 한달음에 달려가 사진을 찍었다. 어느 정도 작가의 본능이 작용했을 것이다. 앞서 불난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는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폭력적인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성공했는가.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사진을 매개로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관한 한, 작가는 실패한 것 같다. 폭력적인 현실을 기록하는(찍는) 일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똑같은 현실을 증언하기(인화하기)에는 실패한 것 같다. 작가의 사진은 폭력적인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기보다는 왠지 다른 지점, 이를테면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낭만적이고 고상해 보이기조차하는 다른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을 매개로 폭력적인 현실을 미학적인 현실로, 날 것의 현실을 각색된 현실로 변질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이건 단순한 실패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아야할 문제다. 다른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면, 작가의 사진은 성공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변질, 그 지향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하는가. 여기서 작가는 사진이 발명되던 초기 사진 인화법을 되불러온다. 반다이크 브라운 프린트다. 직접 인화지를 만들고 현상하는 아날로그 방법이다. 지금은 컴으로 이미지 조작과 편집이 이루어지지만, 전통적인 수작업에선 조작이 상당부분 우연에 노출된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나는 다만 사진을 위한 처음의 소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 정작 사진에 필요한 아우라는 우연이 만든다. 사진에서 아우라가 결정적이라고 본다면, 아예 우연이 사진을 만든다. 그렇게 내가 미처 제어할 수 없는 미증유의 이미지를 지켜보는 것, 우연이 현실을 어떻게 변질시키는지를 지켜보는 일에는 마술적인 뭔가가 있다. 주술적인(현실을 변질시키는) 뭔가가 있고, 미신적인(영적인, 비가시적인,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유령이라고 했을 어떤 존재를 붙잡는) 뭔가가 있다. 현실과는, 다른 현실이 있다. 사진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가 있고, 사진 스스로 발설하는 사연이 있다.

그렇담 그 다른 현실이란 뭔가. 사진적 우연은 어떤 다른 현실을 열어놓는가. 다시, 고성에 산불이 났다. 그리고 작가는 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렇게 남겨진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일에는 성공했고, 현실을 증언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작가가 호출한 반다이크 브라운 프린트는 심지어 흑백조차 아니다. 옅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에 이르는 풍부한 중간 톤을 아우르는 색감이 폭력적 현실을 회화적 현실로 변질시킨다. 지금여기의 지정학적 현실을 익명적인 현실, 미증유의 현실, 시간 저편의 아득한 현실로 바꿔놓는다. 어쩜 고성산불현장을 찍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쇠락한 풍경과 황량한 이미지의 전형을 떠올리게 만든다. 쇠락한 풍경과 황량한 이미지? 낭만주의의 키워드다. 낭만주의는 현실을 믿지 않는다. 현실은 다만 비현실을 떠올려주는 계기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 속에서 비현실을 떠올려주는 계기가 바로 쇠락한 풍경이고 황량한 이미지다. 그 풍경, 그 이미지가 왠지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노스탤지어를 불러온다. 우울과 향수, 낭만주의의 또 다른 정서다. 그렇게 낭만주의는 현실을 미학(혹은 미학적 현실)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이 삶은 이해불능이라고 했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철책 안쪽에 철골구조물이 서 있다. 처음부터 구조물만 있었거나 다 타고 철골만 남겨진 것일 터이다. 아마도 카페였을지 싶은 그 구조물 한쪽에 조형물이 보인다. 말과 반라의 여인상이다. 말은 바닷가를 향해 있고, 여인은 안쪽을 향해 있다. 말은 세상 저편을 바라보고 있고, 여인은 세상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서커스의 말 조련사를 테마로 한 것일 테지만, 작가의 사진 속에서 그 테마는 왠지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얽힌 낭만주의적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Under · Ground : 닫힌 공간 또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지하철 2호선


김소희(독립 큐레이터)



지하공간은 문명의 역사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오랜 옛날 인간은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자연 동굴이나 직접 손으로 땅을 파고 지하에서 살았다. 이제 더 이상 지하 동굴에서 살지 않지만 굴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정교해지면서 지하공간은 현대 도시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다.

인류 문명에서 뿐만 아니라 지하 세계는 고대 신화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그려져 왔다. 그리스 신화 중에 페르세포네(Persephone) 신화는 계절의 순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지하 세계는 곧 겨울을 상징한다. 페르세포네는 한 송이의 수선화를 꺾은 대가로 저승의 지배자이자 죽은 자들의 신인 하데스(Hades;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땅속에 있는 것’을 통칭한다)에 의해 지하 세계로 납치된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Demeter;곡물과 번식의 여신)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자 꽃과 풀이 시들고 과일은 열리지 않았다. 신들이 굶어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하게 여기자 제우스가 페르세포네를 1년 중 1/3은 지하세계에서 살게 하고 2/3는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도록 중재한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에서 지낼 때는 곡식이 자라고 과일이 열리지만 다시 지하 세계로 돌아가면 땅은 얼어붙는 겨울이 된다.

이처럼 고대 신화에는 계절이 순환하듯이 인간의 삶도 지상과 지하를 순환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고대인에게 지하세계는 죽음을 의미했으나 그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그 다음 지하에서의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문’이 바로 동굴이었다.
무기를 연마하여 맹수와 대적할 수 있게 된 인간들이 동굴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동굴은 더 이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과 부패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문명이 형성되면서 동굴은 삶의 이면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또 다른 기능을 목적으로 하는 지하 공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문이었던 동굴은 오늘날의 터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는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로 복잡해지고 정체되는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 터널로 다니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손은영은 지난 1여 년 동안 서울의 지하철을 찍어왔다. 그녀는 9개의 지하철 노선 중에서 서울의 중심부를 타원형을 그리며 운행하는 2호선을 선택하였다. 2호선은 전체 50개의 역 구간을 지하와 지상을 교차하면서 유일하게 순환하는 특별한 노선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을 찍었던 작업 중에는 대표적으로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이 1980-81년까지 뉴욕의 지하철을 촬영한 「Subway」가 있다. 그는 지하철 안 밖에서 만난 뉴욕의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을 리얼하게 포착하였다. 독일 사진가 미하엘 볼프(Michael Wolf)는 연간 30억 명이 이용하면서 지옥철이라 불리는 출·퇴근 시간대의 도쿄 지하철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고단한 모습을 「도쿄의 압축 Tokyo Compression」연작에 담았다.

손은영은 이들과 달리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지하의 풍경을 보여준다. 누군가 "지하철은 도시의 몸에 흐르는 핏줄 같다"고 표현한 바와 같이 지하철의 맨 앞에서 바라본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마치 ‘차가운 콘크리트 핏줄’ 속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저 멀리서 지속적으로 다시 설정되면서, 결코 다다를 수 없도록 끊임없이 달아나버리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는 영상 작업 < ?제목? >도 함께 선보인다. 달리고 있는 철도의 속도로 인하여 변화되는 공간적인 관계들은 앞선 공간의 소멸과 이후 공간에 대한 기대라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 경험된다. 이 작업은 스틸사진과는 또 다르게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체험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관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질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또는 지상에서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마치 페르세포네가 두 세계를 오갈 수 있었던 관문인 동굴(오늘날의 터널)을 통과할 때의 감각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지하철(Subway)은 가장 먼저 산업 혁명의 메카인 런던에서 1863년 1월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메트로Metro(당시 도시철도망을 구상한 Metropolitan회사의 이름을 따서 지하철을 메트로라 부르게 됨)는 근대적 삶의 형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일터로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운율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노래했던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지하철에서 받은 인상을 ‘지하철 정거장에서’(1916년)이라는 시를 통하여 쓴 바 있다. 이 시는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로 짧고 경쾌한 리듬을 가진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증기 기관차로 운행되면서 석탄 매연을 까맣게 뒤집어쓴 채 한 무리 유령처럼 내리는 군중들의 열악한 삶의 환경을 시인은 그렇게 묘사했으리라.
1900년 파리의 지하에 도시철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철도가 반갑지 않았던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아침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을 집어삼키는 미노타우로스 신화 속의 광폭한 황소로 묘사한 바 있다. 그에게도 지하철은 “창백한 안색으로 바느질하던 소녀나 잠이 덜 깬 점원들”이 타는 소시민들의 교통수단이었고 파리의 지하는 밤이면 불빛이 환하게 켜지는 황천길로 비유되었다.

손은영 역시 이번 <The Underground>연작을 통해 삶의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독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주목하였다. 그 사진들 앞에서 우리는 기차 안, 호텔, 영화관 등의 공공장소에서의 도시인의 고독을 그렸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을,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손은영의 이번 연작은 이제 현대인들의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 지하철에서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또는 보이지 않았던 심리적 공간, 즉 도시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사진적 시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