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본 집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손은영은 서울과 군산 등 한국의 도시 주변에 자리한 작고 납작한 집들을 촬영했다. 어두운 밤으로 둘러싸인 집의 외관을 인공의 빛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서 마치 인물을 촬영하듯 하나씩 집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로 인해 집은 인격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어 자립한다. 누군가의 초상처럼 자리한 낮은 집들은 낡고 누추한 대로 기꺼이 사람의 보금자리를 기품 있게 만들어 보인다.

가능한 자신의 정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정직한 집은 가장 기본적인 집의 외관과 구조만을 뼈처럼 드러낸다. 지붕과 벽, 창문 이외의 다른 장식은 거의 없는 집이다. 도로나 길가와 인접한, 그렇게 무방비로 노출된 집들은 출입구를 숨긴 체 밋밋한 벽만을 창백하게 보여줄 뿐이다. 다만 몇 개의 창이 있고 외부의 시선과 접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이 창문으로 붙어 일종의 방어벽을 만들고 있다. 이 어설프고 불안한 시설물은 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심리적인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편이다. 기이한 색상의 페인트로 칠해진 벽은 그만한 강도를 지닌 지붕 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너무 얇고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다. 벽은 그 집에 사는 누군가의 등을 연상시킨다. 혹은 타자의 시선에 대책 없이 드러나 버린 살처럼 민망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빛난다.

 

사진이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일 텐데 그렇게 자리한 대상 자체가 지닌 묘한 시각적인 힘을 작가는 날카롭게 찍어낸다. 비록 더없이 소박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구조와 형태, 매력적인 색채를 품고 있는 레디메이드로서의 이 건축물/집의 외관은 그 자체로 당당한 회화작품처럼 다가온다. 흡사 색채들의 콜라주로 이루어진 색면 회화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름의 조형적인 매력을 간직한 오브제를 선명하고 밀도 있게 건져 올리는 감각이 돋보인다. 이 사진은 그러한 작가의 안목이랄까, 미에 대한 묘한 감수성의 결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사진에 들어와 박힌 대상보다도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작가의 시선, 안목, 조형감각이 우선하는 사진이라는 생각이다.

 

고층 건물 아래에 마지못해 끼어 있거나 허름한 골목길 모퉁이 어딘가에 뜬금없이 박힌 이 작은 집들은 길옆에 바짝 붙어 서서 각박한 생애의 고단함을 스스로 방증하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다소 생뚱맞은 색채와 기이한 형태가 역설적으로 빚어내는 조형도 정형화된 질서에서 벗어난 낯선 미감을 발화한다. 그것은 소외되고 주변부화된 것들의 간절한 반짝임이고 이는 집과 창문으로 발광하는 따스한 빛이 포개지면서 보다 강화된다. 지붕과 벽, 그리고 그사이에 놓인 몇 개의 창문만이 집을 집이게 한다. 이 집들은 현재 번화한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가옥구조이자 아파트와 고층 건물의 현란함 속에서 뒷걸음질 친, 지난 시간대의 집들이자 서서히 사라져가는 건축이다. 이상하고 키치적인 건물이자 주어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필사적으로, 불가피하고 요령껏 만든 집이다. 그래서인지 사진으로 다시 보게 되는 이 집들은 현실감이 줄어들고 마치 영화나 드라마세트장과도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거의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장면이다. 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기에 그러한 느낌은 보다 더 고양된다.

동시에 이 사진은 평범한 주변의 일상 풍경이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실 안에서 어딘지 이상한 파열음을 내는 순간, 장면을 만났고 이를 관찰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익숙한 공간 안에서 마주한 집의 외관에서 어떤 낮섦음과 이상한 욕망과 충격을 건져 올려 찍는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넘어선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해주는 순간을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찰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작가는 밤에 유독 특별한 순간, 장면이 되어버린 것을 건져 올리고 일상과 일상 너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느낌이 사진 속에서 공존하도록 배려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늘상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 감춰진, 그것이 두르고 있는 독특한 순간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란 그것을 보게 하는 이들이고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일상 속의 비일상, 현실 속의 비현실, 사물 속의 꿈, 풍경 속의 또 다른 세계가 이어져 있는 것을 보는 일, 보게 하는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현실계에 은밀하게 숨겨진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도시 공간에 자리한 모든 사물들은 침묵하는 부동의 것들이다. 몸은 있지만 입을 가지지 못해 발화하는 음성은 없지만 그래서 고막에 와닿는 소리는 없지만 분명 사물은 표면과 질감으로 인간의 말과는 다른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문법과 규칙이 소거된 그 상형문자 같기도 한 이상한 문자, 말은 차갑고 완고하게 사물의 피부에 문질러져 있다. 낯선 집의 외벽은 다양한 흔적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잔뜩 서려 있고 그것과 함께했던 누군가의 체취와 지문이 저부조의 층을 만들며 눌려있다. 그래서 사물의 피부에 눈을 주면 사물의 생애는, 그 역사는 매개 없이 그대로 다가와 안긴다. 무수한 사물들로 채워진 도시는 그런 의미에서 거대한 텍스트이자 관능적인 몸들이다. 시선으로 읽고 마음으로 상상하는 텍스트로서의 풍경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사물들 속에서 사는 일이고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공간, 환경을 질문하는 일이다.

작가는 적극적으로 그 도시의 내부로 잠입하면서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찾아낸다. 그녀가 찾아낸 것은 어둠 속에 박힌 작은 집들이다. 밀폐된 벽을 성처럼 두르고 소박한 불빛을 등댓불처럼 방출하는 그 집들의 벽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의 뒷면을 보여줄 뿐이다. 앞이 부재한, 따라서 표정이 지워진 뒷모습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그것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져야 하는 정면보다 더 정직하다. 집이란 공간도 그 내부의 인테리어나 살림살이보다 그 모든 것을 보자기처럼 죄 감싸버린 벽에서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벽 앞에서 들리지 않는 음성을 듣고 보이지 않는 집 안 사람들의 몸의 놀림을 보고 있다. 상상하고 있다. 침묵으로 절여진 집의 외벽이란 경계를 마주하면서 그 피부와 피부 너머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자취가 사라진 이 빈 풍경에는 이상한(?) 건물과 집의 내부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불빛을 전해주는 창문만이 무거운 침묵 속에 놓여있다. 풍경이라기보다는 차갑고 즉물적인 정물의 느낌을 받는다. 다만 보는 이들은 밝은 창문으로 인해 살림살이의 흔적, 사람의 자리를 은연중 상상하게 한다. 햇빛이 모였던 창이 밤이 되면 다시 안의 빛을 밖으로 방사한다. 그것은 막막하고 절대 암흑의 공간에 고립된 집들이 외부에 보내는 구원의 신호와도 같다.

생각해보면 모든 집은 타인에게는 무척이나 완강하고 폐쇄적이다. 사람들의 최종 귀착점은 결국 각자의 집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그만큼 내밀하고 고독하다. 그래서 타자의 집은 타자만큼, 그보다도 타자적이다. 더구나 전통사회와 같은 공공의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모호한 공동체가 무너진 이후 도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의구심과 경계심을 보이면서 이를 집의 구조를 통해 반영한다. 아파트 공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아파트는 기계와 같은 기능 복합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반면 손은영이 사진으로 담은 집은 단독주택이자 현재의 거주공간에서 낙후되어 밀려나고 퇴락한 것들, 빈한했던 지난 시절의 흔적을 아직도 간직한 것들로서 가난하고 소박한 살림을 숨기지 않는다. 벽으로 감싸인 납작한 집들은 방이 있음을 암시하는 창문과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발산하는 불빛이 새어 나온다. 작가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저런 집들이 존재하고 그 집에 분명 사람이 살며 생을 영위하고 잠이 들고 꿈을 꾸고 내일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이 집들, 밤을 배경으로 고독하게 직립한 집의 외관을 통해 그 안에 있는 누군가의 삶과 생애를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 사진들이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위로”가 되고 싶다고 한다.

 

사실 작가는 이 빈집들을 촬영한 다음 후보정을 통해 창에 조명을 기입했다. 그래서 흡사 실제 전기불빛이 퍼지는 듯한 허구를 만든다. 집들은 정면에서 빛을 받고 있다. 지붕과 벽이 어둠 속에서 돌출하듯 밀고 나온다. 이 집들은 주변 풍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거나 밀려 나온 듯하다. 주변 풍경에 비해 이질적이고 생경한 외형을 간직하고 있는 어색하면서도 안쓰러운 이 집들은 또한 그런 사람의 초상, 생애를 대리한다. 반면 볼품없어 보이는 집의 외관과는 달리 작은 창문을 통해 나오는 조명의 불빛은 마냥 환해서 무척이나 당당하다. 그것은 자신의 가난에 기죽지 않는 자존심으로 견디고 있는 매 순간을 연장시킨다.

이처럼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도시의 풍경, 작은 집을 오브제 삼아 흥미로운 풍경, 정물을 구성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레디메이드미학과 연루되면서 절묘한 구성과 기이한 형태, 매력적인 색채들의 조화로, 이상한 조합으로 만들어낸 예기치 못한 미美이고 조형이다. 사진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의 피부에 달라붙어 이를 떠내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너무 낯설고 이상한 아름다움을 무의식적으로 건져 올리면서 사진/회화의 구분을 무의하게 가로질러 가는 시각이미지를 선사한다. 벤야민이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길들여진 시선과는 다른 사진이라는 기계적 시선으로 인해 가능한 초현실적인적인 힘을 누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가장 보편적이고 익숙한 사진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그 비근한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지점을 예민하게 지각시켜주는 사진이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힘들고 규정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과 모종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밀도 있는 공기의 층으로, 몸으로 휘감기는 안개처럼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바로 ‘그것’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KO

손은영의 사진, 말과 여인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사진은 폭력이다.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이지만 무방비상태의 누군가에게, 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황망한 사람들의 면전에, 그리고 불난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는 분명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 아마도 찍히면 죽는다는 세상 말은 원래 사진에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사진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다. 폭력적인 현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증언하는 사진의 운명이다. 어쩜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이미지의 운명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이미지가 사진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과학이고 회화는 감각이다.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말이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이처럼 사진을 과학이라고 전제하고 보면, 사진은 진화와 발전의 산물이다. 사진이 발명되던 초기에는 과학이 그런 것처럼 무수한 형식실험과 허다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그 사진들은 실패한 사진들이다. 동시에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사진들이다. 사진사에도 회화적인 사진이 있었지만, 그렇게 처음부터 회화를 겨냥한 사진들보다 오히려 더 회화적이고 감각적이고 현대적이다. 그동안 사진의 폭이, 회화의 폭이, 그리고 현대적이라는 개념의 폭이 더 넓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고성에 산불이 났다. 손은영은 한달음에 달려가 사진을 찍었다. 어느 정도 작가의 본능이 작용했을 것이다. 앞서 불난 집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는 폭력적인 뭔가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폭력적인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성공했는가.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사진을 매개로 현실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에 관한 한, 작가는 실패한 것 같다. 폭력적인 현실을 기록하는(찍는) 일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똑같은 현실을 증언하기(인화하기)에는 실패한 것 같다. 작가의 사진은 폭력적인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기보다는 왠지 다른 지점, 이를테면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낭만적이고 고상해 보이기조차하는 다른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을 매개로 폭력적인 현실을 미학적인 현실로, 날 것의 현실을 각색된 현실로 변질시키고 있다고나 할까. 이건 단순한 실패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아야할 문제다. 다른 관심사의 측면에서 보면, 작가의 사진은 성공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그 변질, 그 지향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하는가. 여기서 작가는 사진이 발명되던 초기 사진 인화법을 되불러온다. 반다이크 브라운 프린트다. 직접 인화지를 만들고 현상하는 아날로그 방법이다. 지금은 컴으로 이미지 조작과 편집이 이루어지지만, 전통적인 수작업에선 조작이 상당부분 우연에 노출된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나는 다만 사진을 위한 처음의 소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 정작 사진에 필요한 아우라는 우연이 만든다. 사진에서 아우라가 결정적이라고 본다면, 아예 우연이 사진을 만든다. 그렇게 내가 미처 제어할 수 없는 미증유의 이미지를 지켜보는 것, 우연이 현실을 어떻게 변질시키는지를 지켜보는 일에는 마술적인 뭔가가 있다. 주술적인(현실을 변질시키는) 뭔가가 있고, 미신적인(영적인, 비가시적인,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유령이라고 했을 어떤 존재를 붙잡는) 뭔가가 있다. 현실과는, 다른 현실이 있다. 사진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가 있고, 사진 스스로 발설하는 사연이 있다.

그렇담 그 다른 현실이란 뭔가. 사진적 우연은 어떤 다른 현실을 열어놓는가. 다시, 고성에 산불이 났다. 그리고 작가는 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렇게 남겨진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일에는 성공했고, 현실을 증언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작가가 호출한 반다이크 브라운 프린트는 심지어 흑백조차 아니다. 옅은 갈색에서 짙은 갈색에 이르는 풍부한 중간 톤을 아우르는 색감이 폭력적 현실을 회화적 현실로 변질시킨다. 지금여기의 지정학적 현실을 익명적인 현실, 미증유의 현실, 시간 저편의 아득한 현실로 바꿔놓는다. 어쩜 고성산불현장을 찍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쇠락한 풍경과 황량한 이미지의 전형을 떠올리게 만든다. 쇠락한 풍경과 황량한 이미지? 낭만주의의 키워드다. 낭만주의는 현실을 믿지 않는다. 현실은 다만 비현실을 떠올려주는 계기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 속에서 비현실을 떠올려주는 계기가 바로 쇠락한 풍경이고 황량한 이미지다. 그 풍경, 그 이미지가 왠지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노스탤지어를 불러온다. 우울과 향수, 낭만주의의 또 다른 정서다. 그렇게 낭만주의는 현실을 미학(혹은 미학적 현실)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니체는 미학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이 삶은 이해불능이라고 했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철책 안쪽에 철골구조물이 서 있다. 처음부터 구조물만 있었거나 다 타고 철골만 남겨진 것일 터이다. 아마도 카페였을지 싶은 그 구조물 한쪽에 조형물이 보인다. 말과 반라의 여인상이다. 말은 바닷가를 향해 있고, 여인은 안쪽을 향해 있다. 말은 세상 저편을 바라보고 있고, 여인은 세상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서커스의 말 조련사를 테마로 한 것일 테지만, 작가의 사진 속에서 그 테마는 왠지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얽힌 낭만주의적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Under · Ground : 닫힌 공간 또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지하철 2호선


김소희(독립 큐레이터)



지하공간은 문명의 역사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오랜 옛날 인간은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자연 동굴이나 직접 손으로 땅을 파고 지하에서 살았다. 이제 더 이상 지하 동굴에서 살지 않지만 굴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정교해지면서 지하공간은 현대 도시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공간이 되고 있다.

인류 문명에서 뿐만 아니라 지하 세계는 고대 신화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그려져 왔다. 그리스 신화 중에 페르세포네(Persephone) 신화는 계절의 순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지하 세계는 곧 겨울을 상징한다. 페르세포네는 한 송이의 수선화를 꺾은 대가로 저승의 지배자이자 죽은 자들의 신인 하데스(Hades;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땅속에 있는 것’을 통칭한다)에 의해 지하 세계로 납치된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Demeter;곡물과 번식의 여신)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자 꽃과 풀이 시들고 과일은 열리지 않았다. 신들이 굶어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하게 여기자 제우스가 페르세포네를 1년 중 1/3은 지하세계에서 살게 하고 2/3는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도록 중재한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에서 지낼 때는 곡식이 자라고 과일이 열리지만 다시 지하 세계로 돌아가면 땅은 얼어붙는 겨울이 된다.

이처럼 고대 신화에는 계절이 순환하듯이 인간의 삶도 지상과 지하를 순환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고대인에게 지하세계는 죽음을 의미했으나 그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그 다음 지하에서의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문’이 바로 동굴이었다.
무기를 연마하여 맹수와 대적할 수 있게 된 인간들이 동굴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동굴은 더 이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과 부패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 문명이 형성되면서 동굴은 삶의 이면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또 다른 기능을 목적으로 하는 지하 공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문이었던 동굴은 오늘날의 터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는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로 복잡해지고 정체되는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하 터널로 다니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손은영은 지난 1여 년 동안 서울의 지하철을 찍어왔다. 그녀는 9개의 지하철 노선 중에서 서울의 중심부를 타원형을 그리며 운행하는 2호선을 선택하였다. 2호선은 전체 50개의 역 구간을 지하와 지상을 교차하면서 유일하게 순환하는 특별한 노선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을 찍었던 작업 중에는 대표적으로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이 1980-81년까지 뉴욕의 지하철을 촬영한 「Subway」가 있다. 그는 지하철 안 밖에서 만난 뉴욕의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을 리얼하게 포착하였다. 독일 사진가 미하엘 볼프(Michael Wolf)는 연간 30억 명이 이용하면서 지옥철이라 불리는 출·퇴근 시간대의 도쿄 지하철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고단한 모습을 「도쿄의 압축 Tokyo Compression」연작에 담았다.

손은영은 이들과 달리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지하의 풍경을 보여준다. 누군가 "지하철은 도시의 몸에 흐르는 핏줄 같다"고 표현한 바와 같이 지하철의 맨 앞에서 바라본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마치 ‘차가운 콘크리트 핏줄’ 속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저 멀리서 지속적으로 다시 설정되면서, 결코 다다를 수 없도록 끊임없이 달아나버리는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는 영상 작업 < ?제목? >도 함께 선보인다. 달리고 있는 철도의 속도로 인하여 변화되는 공간적인 관계들은 앞선 공간의 소멸과 이후 공간에 대한 기대라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 경험된다. 이 작업은 스틸사진과는 또 다르게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제공한다.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체험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관사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질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또는 지상에서 지하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마치 페르세포네가 두 세계를 오갈 수 있었던 관문인 동굴(오늘날의 터널)을 통과할 때의 감각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지하철(Subway)은 가장 먼저 산업 혁명의 메카인 런던에서 1863년 1월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메트로Metro(당시 도시철도망을 구상한 Metropolitan회사의 이름을 따서 지하철을 메트로라 부르게 됨)는 근대적 삶의 형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일터로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운율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노래했던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1908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거주하는 동안 지하철에서 받은 인상을 ‘지하철 정거장에서’(1916년)이라는 시를 통하여 쓴 바 있다. 이 시는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로 짧고 경쾌한 리듬을 가진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증기 기관차로 운행되면서 석탄 매연을 까맣게 뒤집어쓴 채 한 무리 유령처럼 내리는 군중들의 열악한 삶의 환경을 시인은 그렇게 묘사했으리라.
1900년 파리의 지하에 도시철도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철도가 반갑지 않았던지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아침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을 집어삼키는 미노타우로스 신화 속의 광폭한 황소로 묘사한 바 있다. 그에게도 지하철은 “창백한 안색으로 바느질하던 소녀나 잠이 덜 깬 점원들”이 타는 소시민들의 교통수단이었고 파리의 지하는 밤이면 불빛이 환하게 켜지는 황천길로 비유되었다.

손은영 역시 이번 <The Underground>연작을 통해 삶의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독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주목하였다. 그 사진들 앞에서 우리는 기차 안, 호텔, 영화관 등의 공공장소에서의 도시인의 고독을 그렸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을,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손은영의 이번 연작은 이제 현대인들의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 지하철에서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또는 보이지 않았던 심리적 공간, 즉 도시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사진적 시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